교단일기/교단일기(2008~2009)

10 년 묵은 빚을 갚은 듯

pjss 2008. 10. 26. 20:55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10 년 묵은 빚을 갚은 듯


지난 3월에 사철 꽃피는 학교를 위해

잔디밭 가운데 동그란 화단을 만들고

잔디 밭 가의 네모난 화단에 작은 꽃을 심었다.

학교를 환하게 밝혀주던 꽃이 4개월쯤 지나니 시들어서

지난 6월 말쯤에는 학교 운동장 가와 학교 언덕에 피어난

금송화를 솎아서 화단에 심었다.


여름 한 철을 잘 견디어 주던 금송화도 여름 방학이 끝나고

9월이 다 가기 전에 생명을 마쳐서 이 주사님이

금송화를 잘라버려서 교장 선생님께 국화를 심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국화를 다 심으려면 예산이 너무 많이 드니

국화화분 서너 개만 비치해 놓으라 하셨다.

그런데 내 생각엔 화분 몇 개를 두기에는

공간이 마땅하지 않아서

실행에 옮기지 않고 그냥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 달여 기간 화단이 텅 비어 있었다.

차라리 화단이 없으면 몰라도

네모난 화단이 잔디밭 가에 떡 하니 버티고 앉아서

빨리 무엇인가를 심어달라고 재촉하는 거 같아

그 화단을 볼 때마다 마치 누군가에게 빚진 사람처럼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정의 꽃들도 다 지고

나뭇잎마저도 하나 둘 떨어져

그렇잖아도 볼품도 별로 없는 작은 학교가

삭막하게 변해 가니 안타깝기까지 하였다.


오늘 남편과 함께 시댁엘 다녀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화단 생각이 났다.

“오늘은 작은 국화라도 사다 심어야지 안 되겠어.”

하며 내가 자주 가던 ‘갈대밭 식물원’ 앞에 차를 세우게 했다.

마침 식물원에는 작은 포토에 든 많은 소국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개의 값이 2~3천원이니 우리 학교 화단에 다 심는다 해도

한 15만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밤 12시 경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가서

내일 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 물때가 괜찮으면 내가 가서 심어줄게.”

하는 남편의 말에 조석예보 표를 보니 빨리 하면 심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주사님께 전화를 하니 지금 막 우도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해서

동강에 가서 이 주사님을 싣고 우도에 들어갔다.


남편, 이 주사님과 함께 부랴부랴 괭이와 삽, 호미, 장갑을 챙겨서

아직 남아있는 금송화의 뿌리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가지고 간 노랑, 빨강, 분홍색의 소국을 옮겨 심으니

아, 학교가 갑자기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조금만 예산을 투자하고 노력하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는 것을

그동안 한 달여 기간을 애만 태우고 실천하지 못했다니.......


이틀에 한번씩 물을 줘야 한다는 내 말에

꽃이 상하지 않게 호스가 아닌 조리로 물을 주겠다는

이 주사님을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돌아오는 차 안에서

10 년 묵은 빚을 갚고 난 듯 마음이 후련하였다.


‘환하게 바뀐 화단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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