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모습 그리며 커 가는 우정
『새교육』 한국교육신문사 2003년 12월호
박점숙 / 전남 광양북초 교사
"야! 움직이면 어떡해?"
"미안- 미안."
"자세가 틀어졌잖아."
"음- 이렇게 하면 돼?"
"아냐, 그게 아니란 말야."
"그럼 이건?"
"그래 그래 조금만 더."
"이렇게?"
"응, 이제 절대 움직이지 마."
"알았어."
우리 반의 점심 시간 풍경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매일 점심 시간이면 멋진 화가가 된다. 모델을 가운데로 하고 모두들 비 잉 둘러앉아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며 '친구 모습 그리기'를 한다.
미술 시간에 경험한 것 그리기, 보고 그리기, 상상하여 그리기를 할 때나 독서감상화를 그릴 때 또는 체험학습을 다녀온 후에 만화로 나타내기 등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학습을 많이 한다. 그럴 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움직임이 잘 나타나 있지 않거나. 몸뚱이는 옆으로 되어 있는데 얼굴은 앞을 보고 있다든지, 앉아서 발을 포개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 자세히 관찰하여 특징이 나타나게 그리기보다는 여학생들은 예쁜 공주스타일 그림을, 남학생들은 졸라맨 식의 그림을 그리기 일쑤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학년이 거듭될수록 아이들의 그림 실력은 점점 저하되어 6학년이 되면 창의성이 결여되고 색이 바랜 듯한 죽은(?)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신념으로
그러한 그림들을 접하면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지도를 해야할지 난감하기 그지없고, 일 주일에 두 시간 들어 있는 미술 시간, 그 중에서도 각 영역별로 나뉘어 있어서 보고 그리기, 경험한 것 그리기, 상상하여 그리기, 판화 다 포함해 보아야 한 학기에 8-10 시간뿐이어서 실력 향상을 위한 지도를 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그림이 잘못 그려진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를 모르겠고, 내가 손을 대어도 더 나아지지가 않아서 민망하기 짝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난 학교 근처에 있는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4B연필 쓰는 법, 선 긋는 요령, 명암을 처리하는 법, 지우개 사용법, 원근법의 원리, 수채물감 사용법, 덧칠하는 방법 등등 여러 가지를 배워나갔다. 한 가지 한 가지를 배울 때마다 모든 사물들이 새롭게 보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난 학원에서 배운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매일 점심 시간이면 우리 반 아이들에게 그리기 지도를 시작했다.
맨 처음 4B 연필과 4절 스케치북, 지우개를 준비하고 학교에 이젤이 없으므로 이젤을 대신할 스케치북보다 약간 큰 합판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점심시간이면 의자와 합판을 이용한 간이 이젤을 마주하고 앉아서 선 그리기부터 하나하나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가 너무 갑작스레 욕심을 부린 때문인지 도대체 실력은 늘지 않고, 그림다운 그림 하나 그려보지도 못한 채 내가 먼저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살아있는 그림 그리기' 책은 나의 그림 그리기 지도에 다시 기름을 부어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였다. 그 책을 발견한 순간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창조는 모방에서 비롯된다
책을 사서 집에 가져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책에 있는 내용을 복사를 하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우리 그동안 힘들게 4절 스케치북과 싸워왔는데 이제 작은 그림을 그려봅시다. 여러분은 그동안 큰 그림을 많이 연습하였으므로 작은 그림은 훨씬 쉽게 잘 그릴 수 있을 거예요."
의아해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림 그리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아이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우리도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종이에 옮기려고 노력하면 그릴 수 있다'고 얘기하고 연필이나 칼, 필통, 운동화, 가방 등 생활용품 등을 그려보게 하지만 아이들은 처음부터 썩 잘 그리지 못한다. 하지만 절대 실망하지 말고 어느 한 곳이라 잘 된 부분을 찾아 크게 칭찬해주고 잘 못된 부분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다른 지면에다 다시 그려보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어느 정도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세밀해지고 무엇인가 더 그리고 싶은 의욕이 생길 무렵 사람 모습 그리기를 시작했다. 사람을 그릴 때는 특히 움직이는 모습을 잘 표현해야 한다며 친구를 한 명 모델로 정하여 폼을 잡게 하고 그려보라고 했더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만화그림처럼 표현을 해 놓았다. 그래서 다시 후퇴(?)하여 나름대로 단계를 설정하여 계획을 세웠다.
우선 1단계로 책에 그려진 그림을 복사하여 나누어주고는 그대로 옮겨 그려보게 하였다.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리는데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표현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이들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보다는 생각대로 그리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생각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사물을 관찰하여 자세히 그리기이므로 선 하나 하나를 짚어가며 고쳐 주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여야 했다.
그리고는 2단계로 스포츠 신문에서 움직임이 잘 나타난 사진을 오려 코팅하여 나누어주고는 그려보게 하였다.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아이들이지만 또 한 번 고비를 겪어야 했다. 특히 얼굴모습 표현을 가장 힘들어했다. 다른 어떤 부위보다 만화형태를 벗어나기 힘든 곳이 얼굴이었다.
어느 정도 2 단계가 익숙해지면 3단계로 친구 모습 그리기를 시작한다. 친구 모습 그리기를 시작하면 서로 모델을 하겠다고 나서서, 처음엔 가장 그리고 싶은 친구를 말하게 하여 그려보게 했으나 인기의 순위를 정하는 것 같아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음부턴 얼굴의 특징이 잘 나타난 친구를 서너 명 차례로 모델로 정해 주고는 다음부터는 제비뽑기를 하여'오늘의 모델'을 정하여 우리 반 모두가 한 번씩 모델이 되는 기회를 갖는다.
모델을 보고 그리기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 그러므로 먼저 부분을 정하여 살펴보고 그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손가락에 나타난 마디, 옷의 주름진 형태, 입술, 눈 , 귀 등의 생김새, 팔을 구부리면 나타나는 현상, 앉아있을 때와 서 있을 때의 비례 등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하고 그리는 시간을 무수히 많이 필요로 한다.
한 사람 그리기가 끝나면 두세 명의 그룹을 그리기도 하고 모둠원 의 어깨동무한 모습을 그리기도 하는데 친구 모습 그리기를 할 때면 친구의 어디가 가장 예쁘고, 잘생겼는지 또 어느 부분이 개성 있는지 잘 살펴서 그 부분을 특징 적으로 그리게 하면 참 효과적이다. 그리고 친구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좋은 점을 발견하게 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한다.l
숨은 소질을 찾아 계발하고
대개의 경우 아이들을 지도하다보면 눈에 띄게 그리기 실력이 월등한 아이가 한두 명 있게 마련이다. 그런 아이가 한 명 발견되면 그 아이의 그림을 보여주며 잘 된 곳을 찾아 칭찬해 주고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처럼 그려보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내가 설명하고 시범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터득을 하게 된다.
몇 년 전 효순이는 그림 그리기를 하기 전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기 실력이 남달리 뛰어나 우리 반의 화가로 불리었으며, 이전에는 한 번도 출전 해 본 적이 없던 각종 그리기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미는 그림 그리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장래 희망이 화가로 바뀌었으며 학년말에 우리 반 문집을 만들 때, 나를 포함한 반 전체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열성을 보여 나를 놀라게 하였다.
2학기가 되어 자신의 그리기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이 되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파일 첩을 보며 날로 발전해 가는 그리기 실력에 뿌듯해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중학교에 진학하여 미술 시간에 칭찬을 받았다든지 수행평가 할 때 선생님이 고맙다든지 하는 말을 전해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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