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르친 나의 아이들
2000년 3월
<우리 아이들>
동명초등학교 교사 박점숙
우리 반은 매주 월요일 아침 시간에 ‘독서학습발표회를 한다. 1주일 동안 읽은 책 중에서 1권을 선정하여 감상문을 발표하는 형식인데, 먼저 각 모둠에서 모둠원들이 발표를 하고 대표를 뽑아 전체 발표회를 가진다. 내용 전달이나 느낌을 잘 발표한 아동을 발표왕으로 뽑아 아동들이 100원씩 모아서 마련한 책을 상으로 준다.
오늘도 아이들은 내가 교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제 32회 독서학습발표회'란 제목을 칠판에 붙여놓고 발표회가 한창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함께 해주지 못한 게 미안하여 슬그머니 내 자리에 가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이제 모둠 대표들의 발표가 다 끝났습니다. 혹시 발표를 꼭 하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진행자의 말에 슬그머니 손을 드는 아이가 있었다. 순간 두리번거리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시선을 고정시킨 바로 그 자리에 수줍은 미소로 손을 들고 있는 상준이!
5월말쯤 전학을 왔는데 왜소한 몸집과 어린 티를 못 벗어난 천진스런 얼굴에 말씨가 어눌(?)하던 아이. 읽기와 쓰기를 전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 막 읽기․쓰기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더듬거리는 읽기와 서툰 글씨로 우리 반과 나를 놀라게 했던 아이. 무슨 일이건 자신이 없어하며 슬그머니 빠지려고만 해서 애를 먹이던 아이, 다함께 부는 리코더 시간에도 '삐이-익' 소리로 화음을 망쳐놓곤 하던 아이. 그 상준이가 손을 든 것이다.
"그럼, 노상준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예, 저-는 김-마리아-를 읽-었습니다. 김- 마리아는..."
어느 구석에서 킥킥거리는가 싶더니 그것도 순간, 교실은 이내 적막에 빠졌다. 상준이의 발표를 듣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자신이 써 놓은 글씨를 읽어내는 데도 무척이나 힘들게 더듬거리는 상준이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우리 반 모두는 손에 땀을 쥐었다.
드디어 기나긴(?)시간이 지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상준이! 아이들은 만장일치로 이 주일의 발표왕으로 상준이를 뽑았다.
"비록 발표는 서툴었지만 상준이가 스스로 발표를 한 점과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자"며....
상으로 '제 32회 독서학습발표회' 제목의 종이와 책을 받아들고
"독서-왕이- 되어 기-쁩니다. 다-음에는 더- 발표를 잘-하겠습니다."
여전히 더듬거리는 말씨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감을 발표하는 상준이와 힘찬 박수로 격려하며 자신이 발표왕이나 된 것처럼 좋아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며 콧날의 시큰함을 감추기 위해 나는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아이들아!
그 동안 내 기준의 잣대로 너희들을 바라보며, 늘 기대에 못 미친다고 꾸중을 하기 일쑤였는데 너희들은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크나큰 사랑을 키워오고 있었구나. 그래, 교실이 좀 시끄러우면 어떠니? 우리가 힘들게 가꾸어온 약속장 쓰기, 좋은 생각 듣기, 모둠 노래 발표회, 생일잔치, 이 주일의 노래 부르기, 스스로 하루 열고 닫기, 친구 칭찬하기....... 그러한 모든 시간들이 오늘 상준이가 발표를 할 수 있게 하고, 또 너희들 모두가 이렇게 따뜻한 가슴을 지니게 했다면 교실이 좀더 시끄러워도 좋으리라. 발표를 유창하게 해야만 발표왕이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약간 부족한(?) 친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발표왕으로 뽑아준 너희들을 틀렸다고 말 할 사람이 어디 있겠니? 오늘은 너희들이 스승이 되어 부족한 나를 가르치고 있구나.
매스컴에선 말한다. 교실이 심각하게 붕괴하고 있다고, 교육관계자도 선생님도 학부모도, 학생들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상준이의 국어실력을 높이겠다고 받아쓰기를 시키던 보름이, 수학을 돕겠다며 분수의 기초를 가르치던 형배, 리코더 지도를 위해 손잡고 운지법을 가르치던 송아, 그리고 오늘처럼 통재로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어희들이 있는데 어찌 교육의 미래가 어둡다고만 할 수 있겠니?
오늘 나에게 참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나의 교육 방법에 용기를 준 나의 아이들아, 정말 고맙다. 너희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아직 희망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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