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육 12월호에서 옮겨옴>
바로가기http://www.uriedu.co.kr/magazine/articlesView.asp?search=&searchword=&gubun_cj=C&bcnt=Y&seq=29222
끝없는 고민의 길 위에서
박 점 숙
전남 고흥 남양초 우도분교 교사
우도분교는 전남 고흥반도의 초입, 우도라는 작은 섬에 있다. 섬은 섬인데 오가는 여객선은 물이 빠지면 천혜의 뭇 생명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뻘밭 한가운데에 우도로 가는 길이 열린다. 좀 전까지 바다였던 갯벌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기분이 묘하다.
우도분교 학생은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다섯 아이들이 전부이다 박점숙 교사가 작은 학교 중에 작은 학교인 이곳 우도분교장으로 온 것은 올 3월이다. 1학년 지은이와 2학년 은상이의 담임을 맡고 있는 박 교사는 아이들에게 교사이자 부모이다.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밥 때가 되자 박 교사가 있는 사택에서 밥을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교사가 열정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도시에서는 도시 상황, 섬에서는 섬 상황에 맞게 역할도 달라져야 해요.”
생업이 바빠 돌봄의 손길이 부족한 섬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래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28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하면서 얻은 노련함 덕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갖춘 교사는 아니었다. 박 교사에게도 꺼내놓기 부끄러운 초임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선생은 ‘내’가 아니라 ‘매’였다.
그가 발령받은 1980년대는 매달 월말평가를 보고 그 시험 성적으로 ‘잘 가르치는 ’교사를 가름하던 때였다. 때문에 시험 점수를 올리는 것은 교사의 사명 같은 것이었고, 그 명을 달성하기 위해 박 교사는 ‘매질하는 교사’가 되었다.
“날마다 외우게 하고 시험 보고틀리면 매 때리고, 그게 일이었어요. 그때는 그거 외에는 다른 방법을 몰랐죠. 저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컸고, 한마디로 말하면 준비되지 않은 교사였어요.”
‘어린’ 박 교사는 손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팔을 못 움직일 정도로 아이들에게 매를 들었다. 매의 힘을 빌려서인지 아이들 성적은 점점 올라갔지만 매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하루는 학부모 고깃배를 빌려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가는데 가는 중에 물이 빠져 버렸어요. 배가 끝까지 못 가게 되니까 애들이 종아리를 걷고 내렸죠. 뒤에서 아이들을 챙기는데 우리 반 아이 다리에 뭐가 묻어 있는 거예요. ‘○○야, 다리에 뭐가 묻었다.’ 그랬죠. 근데 아이가 ‘선생님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래요. 가까이 가서 보니까 그게 멍 자국이었어요. 내가 매를 때려가지고. 그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 전부 다 보라색, 빨간색 멍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어요. 내가 저렇게 혹독하게 매를 때렸나 반성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 와중에도, ‘매를 때리지 않아야겠다.’가 아니라 ‘이제 종아리는 안 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죠. 그때부터 손바닥을 때렸죠.(웃음)
열린교육 교사로 불리다
자신의 교육 방식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10년 차쯤 되었을 때였다. 박 교사는 언제까지 아이들을 때리면서 주입식 교육에 매달려야 하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시도한 것이 체험학습이었다.
체험학습은 주로 실과나 사회과에서 하게 되었다. 가령 6학년 사회과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공부할 때 박 교사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그 나라 대사관에 편지를 보내게 했다. “주한 미대사관, 프랑스대사관, 영국대사관.... 한국에 있는 대사관 주소를 다 알아내서 한 사람이 두세 나라씩 골라 보냈어요. 그 나라의 교육정책, 특산물, 산업, 특징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우리가 100개 나라 이상 보냈는데 60개국 정도에서 답장이 왔어요. 자료나 팜플렛을 엄청 보내주기도 하고 화보나 녹음테이프를 보내주는 곳까지 있었어요. 그 편지 올 때마다 교실에 환호성이 일어나는 거예요. 정말 아이들이 좋아라했어요. 그렇게 받은 자료들을 전지에 나라별로 정리해서 발표도 하고 복도에 전시하기도 했었어요.”
당시 자신의 행보에 하나의 계기가 된 책이라며 박 교사는 오래된 책 한 권을 배보였다. 1991년 2월호 우리교육 별책부록으로 나온 학급운영 사례집이었다.
“다른 학년 교실에 시험 감독을 들어갔는데 선생님 책꽂이를 보다가 거기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어요. 모둠활동, 민주적인 선거방식, 더불어함께 생활하는 것, 그런 것들이 쓰여 있었어요. 그동안 내 방식이 최고인 줄 알고 해왔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제가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스폰지처럼 빨아들였죠.”
이후 박 교사는 매를 들지 않았다. 문제집 학습도 시키지 않았다.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어주는 대신 당장 성적이 조금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방법을 택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생활을 계회하고 실천하고 반성했으며, 사소한 규칙 하나도 필요에 의해 토론으로 결정했다. 교사는 교사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빠졌지만 학교생활은 점점 신이 났다. “애기 낳고 결혼하고 5년, 10년 해가면서 식어가던 데에 불이 붙은 거예요.”
한 걸음 한 걸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게 되면서 박 교사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아이들에게 또 다른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데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머리가 한계가 있잖아요. 답답했죠.”
그때부터 박 교사는 대학 때도 않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서점을 드나들며 책을 읽었다.
“그 무렵에 책을 200권은 읽었을 거예요. 교육에 관한 책이라고 하면 있는대로 섭렵을 했어요.”
박 교사가 그렇게 서점을 찾았던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교육방식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어서였다. “문제집 학습 안 시키니까 아이들 성적은 떨어지고 모둠활동 하면서 교실도 소란스러워지잖아요. 보기에 우리 반은 노는 것만 같으니까 욕도 많이 먹었어요. 우리 아이들 듣는 데서 저런 것들도 선생이냐고 하는 교사도 있었고, 아이 성적 떨어진다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 때문에 교장선생님한테도 몇 번 불려갔어요. 그래도 고집을 피웠죠.”
그런 그에게 확신을 심어준 것은 책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중학교 가서 정말 잘했대요. 교장선생님한테 항의 전화했던 학부모가 다시 전화해서 제 교육이 옳았다고 말해줄 정도였어요.”
그렇게 안으로 밖으로 치열한 날들을 보내다 보니 박 교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교육 교사’로 유명해져 있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열린교육 붐이 전남까지 이른 95년 무렵이었다. “사실 그때 저는 열린 교육이 뭔지도 몰랐어요.”(웃음)
또 다른 길에 발 딛으며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박 교사는 40대 후반에 들어섰다. 2,30대에 가졌던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고 그 위로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루는 한 아이가 저를 부르러 왔어요. 밖에 어떤 ‘할머니’가 나를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나가 봤는데 저보다 정말 한두 살밖에 안 많아 보이는 분인 거예요. 그 때 그 ‘할머니’라는 말이 저한테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자신이 나이를 먹었음을 의식할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도시에서는 나이 먹은 교사들을 싫어해요. 할머니 선생님이 담임하면 아이들 눈빛이 달라져요. 물론 열심히 하고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지만, 학년 초가 되면 학생들, 학부모들 앞에서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무시할 수 없더라고요.”
학교에서 원로교사 취급을 받는 것도 박 교사에게는 영 마뜩찮은 일이었다. “나이 먹으면 학교에서 일도 안 맡겨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동료교사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 역할을 못하게 된 거잖아요.”
그는 조금씩 힘에 부친다는 것을 느꼈다. 자기가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는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도 예전 같지 않은 어색함이 느껴졌다. 정년까지 이런 몸과 마음으로 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 자세라면 그만둬야 될지도 몰라요. 그런데 꼭 그 길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박 교사가 선택한 또 다른 길은 다름 아닌 승진이었다. 승진의 길을 마음먹으니 교사로서 그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점수관리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연구학교도 찾아가야 하고 도서벽지학교도 찾아가야 했다. 박 교사가 이곳 우도분교에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편리한 생활과는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객선이 없어 마음대로 섬을 드나들지도 못하고, 관공서나 그 흔한 슈퍼 하나 없는 환경 때문에 실제로 우도분교는 도서벽지학교를 나누는 등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으로 분류된다. 그만큼 이곳으로 오려는 교사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박 교사 역시 그 경쟁을 뚫고 섬에 들어왔다.
“도시 학교 있을 때는 시골학교에 가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쳐 보는 게 꿈이었어요. 아이들을 내 집 아이들 같이 살피는 교사 있잖아요.”
시골 학교로 옮겨왔고 사택에 살다시피 하면서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먹이고 때론 씻기고 입히는 지금, 박 교사는 예전에 지녔던 꼼 하나를 실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박 교사는 그 즐거움과 보람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다.
“솔직히 지금은 나의 영달을 위해서 왔으니까.... 그것이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죠.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더 잘해줘야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거예요. 예전에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여길 지망해서 왔다면 지금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그렇다면 동료교사의 시선, 지역주민의 시선, 어떤 시선에 대해서도 떳떳할 수 있잖아요.”
아이들 곁에 남는 또 다른 길이라 생각하고 선택한 길에서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죄의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정말 평가 잣대가 달라서 아이들을 위해 열심인 교사가 승진된다면 좋을 텐데.... 저는 어떻게 보면 용기기 없는 거죠. 그동안 내가 소신껏 해왔던 그런 게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거 같은 그런 느낌도 있어요. 괜히 내가 그런 거에 합류가 되가지고.... 아휴, 진짜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거 괜히 한다.’ 그래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어요.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한 갈등은 아직도 있어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 박 교사의 고민은 쉬이 사그라질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의 왜곡된 승진 시스템 속에서 평교사 아닌 승진의 길을 택하는 모든 교사들이 겪는 아픔일지도 모른다.
<글 : 김도연 기자, 사진 : 최승훈 기자>
'가족 그리고 나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자와 함께 하는 새교육 (0) | 2009.02.06 |
---|---|
[스크랩] 시간별 학급경영 (0) | 2009.01.30 |
난 꼭 해내고 말테다. (0) | 2008.11.20 |
[스크랩] 박남기,박점숙,문지현의 [교사는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읽고 (0) | 2008.11.16 |
뜻밖의 일이!!! (0) | 2008.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