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교단일기(2008~2009)

추석 선물

pjss 2008. 9. 14. 21:22

 

2008년 9월 12일 금요일


추석 선물


“선생님, 2학기부터는 집에 가서 밥 먹고 올래요.”

“응?....... 왜?"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라고 했어요.”

“으응, 그래? 왜?”

“몰라요.”

점심시간이면 나랑 함께 식사를 하던

세은이가 2학기 들어서는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겠다고 하였다.


‘내가 혹시 무얼 서운하게 했을까?’

괜한 걱정이 앞서 할아버지께 전화라도 해 볼까 싶었지만

차마 여쭤보기가 그래서 기다리다

지난 번 9월 1일자로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해 오신 교장선생님께서

우도를 방문하셨을 때 만난 세은이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선생님 귀찮으실까봐 그러지요. 다른 이유야 있겠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아, 전 괜찮아요. 내일부터 세은이 점심 학교에서 먹도록 할게요.”

“아, 뭐, 귀찮으신데.......”


다음 날부터 세은에게 나와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였지만

하루를 함께 먹고 나더니

다시 집에서 먹고 오겠다고 하였다.

‘혹시 반찬이 입에 맞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세은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으니 여기서 먹도록 해.”

“아뇨, 집에 가는 것이 더 좋아요?”

“왜? 집에 더 맛있는 반찬이  있는가 보구나.”

나의 농담에 세은이는 정색을 하며

“아니에요. 집에 가면 밥 먹고 나서 누워 있다 올 수 있으니 좋아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여기서도 밥 먹고 나서 누워 있으면 되잖아.”

“아니,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궁색한(?) 변명을 해 가면서까지

기어코 집에서 점심을 먹겠다는 세은이를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마음 한 쪽이 어쩐지 개운치가 않았는데.


오늘은 점심시간에 집에 다녀온 세은이가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천천히 오지 뭐가 그리 급해서 달려왔어.”

“히히히......”

 바알갛게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감추고 있던 두 손을 내밀었다.

“이거요.”

“이게 뭔데?

“이거 추석 선물이예요.”

“응, 무슨.......”

“울 할머니가 갖다 드리래요.”

“그래?”

세은이가 내민 검정색 비닐 봉투 속에는 배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아, 배이구나. 너 먹지.”

"집에 또 있어요."

"그래. 고마워."

“근데요, 선생님 배가 아주 싸요.”

“그래 얼마나 싼데?”

“이렇게 큰 배가 열 개도 넘는 데 글쎄 그게 만원 밖에 안한대요.”

“오, 그래. 참 싸기도 하구나.”

“흐흐흣.......”

세은이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으며 싱글벙글이었다.


추석 명절을 쇠려고 할머니께서 시장을 봐 오신 모양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배 두개를 골라 나를 주려고 가져온 것이다.

자세히 보니 세은이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도시에선 흔하디흔한 게 배이지만

이 조그만 섬마을에서 그러한 배라도

얼마나 마음껏 먹어보았겠는가?

겨우 추석 명절이나 되어야 구경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 배를 내게 주면서도 연신 싱글벙글 웃는 세은이를 보며

이 세상의 어느 선물이 이 보다 더 값질 것인가 생각하니

올 추석엔 무엇보다 풍성한 세은이의 선물 덕에

먹지 않아도 보름달만큼이나 배부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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