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나의 학급경영기

새로운 모습으로 기억되고픈 아이들에게

pjss 2008. 6. 29. 15:51
새로운 모습으로 기억되고픈 아이들에게
                                                                                   『새교육』 한국교육신문사 2003년 3월호
                                                                                                     박점숙 / 전남 광양북초 교사

시업식!
해마다 그 날은 밤잠을 설친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로 만날 아이들 생각에 기쁨과 긴장감이 함께 한 전날 밤은 무던히도 길다.
'올해는 몇 학년을 맡게 될까?'
'나와 함께 일 년을 새롭게 열어갈 나의 아이들은 어떤 애들일까?'
'미리 담임 배정이 되어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학급 아이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
이런 저런 생각들은 전날 밤에서 아침까지 꼬리를 물고 나를 놓아주질 않는다. 그래서 난 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다.

미리 준비한 약속장 50권과 자리표를 가지고 출근해 반 배정을 받아 6학년 4반의 담임이 되었다. 교사들의 반 배정과 사무분장 발표 후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아는 친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후닥닥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교실에 들어선 후 맨 먼저 반 배정표에 적힌 이름과 얼굴을 한 명 한 명 확인한 후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칠판에다 크게 내 이름을 적었다.
'박·점·숙'
" 제 이름은 선생님이 태어날 때 내 신체의 어딘가에 10원짜리 동전만 한 푸른 복점이 있어 우리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귀한 이름이에요. 과영 어디에 복점일 있을까 맞혀 볼까요?"
촌스런 내 이름 덕에 "킥-킥"하고 한두 군데서 터뜨리던 웃음은 금방 교실 전체로 번지고, 곧
"배꼽이요."
"가슴이요."
"엉덩이요."
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소리를 낸다.
별로 온화하지 못한 내 표정 때문에 한껏 긴장한 아이들의 긴장감이 조금 늦춰지는 듯 하면  나는 분필을 들고 칠판에 적는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내가 쓰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따라 읽던 아이들이 뜻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난  제법 숙연한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각 이 자리에서 여러분은 나와의 관계로 새롭게 태어나는 거예요. 어제까지 여러분이 누구였던지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난 여러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5학년 때까지 여러분이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도, 누가 공부를 얼마나 잘해왔는지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누구고 뭘 하는 분인지도 몰라요. 선생님은 여러분의 지금 이 모습, 앞으로 여러분의 모습만 보겠어요. 보여지는 대로, 있는 그대로 보겠어요. 내가 좀 부족하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지금부터 최선을 다하세요. 사람들은 흔히 최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누구든지 어떤 분야에서건 최고가 되려고 노력을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고가 가치가 있는 까닭은 최고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난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세요."
이야기가 끝나자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알 듯 말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이, 도대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만 멀뚱멀뚱한 아이 등 아이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다.
이렇게 나의 열네 번째 제자들과의 첫날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다짐과 함께 한 신학기

  준비한 자리표로 제비뽑기를 하여 자리배정을 하고, 약속장 쓰기, 책상 속 정리하는 일, 사물함에 가방 넣기, 일어 설 때 의자 넣기까지 지도하고 나면 미리 준비한 종이를 나눠주고 [6학년이 되어서]를 주제로 글을 써 보게 한다. 맨 먼저 자기 소개를 한 다음 6학년이 되어서 첫날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6학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되도록 새로운 계획이나 다짐을 자세하게 써 보도록 한다.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신바람나게 5-6장이 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2-3장으로 1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새롭게 시작한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마무리를 하여 다 쓴 글을 제출할 무렵 한 아이가 글이 적힌 종이를 뒤로 감추고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저- 집에서 다시 써오면 안될까요?"
매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왜? 여태 다 쓰지 않았니?"
"쓰긴 썼는데 ...."
"어디 보자."
그러자 종이를 보여주지 않으려 뒤로 감추며 한 발짝 물러선다.
"그래? 그럼 집에서 써 오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자 금방 환해진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인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아이에게 이름을 물으니 손경완이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부러 조금 늦게 출근해 아이들의 동정을 살폈다. 아직은 서로 서먹한지 아침에 오는 대로 눈치를 봐가며 책가방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선배들이 물려주고 간 낡은 책들을 읽는 척(?)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부러 크게 소리내어 인사를 하고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어느 새
"선생님, 여기-"하면서 어제 '6학년이 되어서'를 제출하지 않았던
경완이가 다가와 손을 내민다..
"어디 보자."
경완이가 내민 글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뭉클함으로 콧날이 시큰했다.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글씨를 반듯하게 쓰려고 또박또박 눌러 쓴 연필 자욱이 역력한 글씨와 맞춤법이 서툴어서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곳도 있는 경완이의 글은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경완이의 몸부림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내가 글을 다 읽을 때까지 머리를 계속 긁적이며 씽긋이 웃고 있는 경완이의 손을 잡아주며
'경완아, 그래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선생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네게 꼭 보여주는 좋은 선생님이 될게.'
하고 경완이가 아닌 내 자신에게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아이들과의 만남, 그 중 경완이는 한 해가 지나고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 주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교실에 있던 내 가방에서 지갑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 했다. 지갑을 걱정하며 돈은 없어져도 좋으니 주민등록증이라도 찾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 며칠 후 경완이는 길가에서 주웠다며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이웃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패싸움, 운동장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다 1반 동광이의 코뼈를 부러뜨린 일, 수학여행 가서 친구가 맘에 안 든다며 유리창을 발로 차 응급실에 실려가 발바닥을 꿰맨 일 등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일년이 다 가고 졸업이 다가왔다. 졸업식장에선 다른 친구들의 절반도 안 되는 두께의 약속장이지만 가슴에 꼭 안고 내게로 다가와 꾸벅 절을 하는 경완이를 보며 그래도 일 년 동안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는 첫날의 내 말을 끝까지 믿고, 힘들었지만 새롭게 시작하기를 거듭해 온 경완이를  좀더 많이 인정해 주지 못하고 일년을 보내 버린 게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흔히 교사들은 학년초가 되면 아이들을 인계인수(?)한다. 그러면서 '이 아이는 이런 점이 이렇고, 저 아이는 저런 점이 저렇고, 또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고 딸이고...'등 이래 저래 말들이 많아서 아이들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보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기 쉽다. 물론 특별히 장애를 가지고 있다거나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담임이 먼저 알고 있어야할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교사들이 새 학년을 맞아 새롭게 시작하고 싶듯이 대부분의 아이들도 지난 학년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새 담임이 알고 있는 것보다는 새 학년이 되어 나도 한 번 잘하여 인정받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교사들은 선입견 없이 아이들을 보아주고 그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기 자신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쓴 글을 보여 주고 나서 받은 칭찬으로 의기양양하여 씩씩하게 돌아서던 경완이는 며칠 간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서툴고 느리긴 했지만 무슨 일이든지 한 번에 안되면 두 번에, 두 번에 안되면 세 번에, 거듭거듭 실패하면서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초학력 평가 결과가 나온 날 고개를 꺾고 풀이 죽어 있던  경완이는 그 후로 주어진 일 하나하나에 정성이 덜하고 씩씩함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기야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기에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나의 욕심을 따라오기엔 역부족이었는지 경완이는 일감처리를 하지 않게 되고 수업 시간에도 건성으로 앉아 있고 뭔가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 후 중학교에서 유도부원이 되어 유도를 배운다던 경완이가  7 년의 세월이 흐른 작년 봄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든 청개구리 카페를 통해 인사를 하더니 며칠이 지나 충근이랑 함께 나를 찾아왔다. 검정색 양복을 쭉 빼 입은 의젓한 모습으로 이제 조직(?)에서 발을 빼고 형이 운영하는 일식집에서 서빙을 하면서 일을 배우고 있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지금은 비록 종업원이지만 언젠가는 근사한 일식집을 차려 선생님을 모시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돌아간 다음 날 카페에 이런 글을 올려놓았다.

선생님 저 경완입니다 오늘 뵙게되어서 정말 기분좋습니다 진작에 뵙어야
하는데........선생님볼면목이업었습니다.....근데.......선생님 이뿌신
건아직까지 여전하시내영......*^^*초등학교때 누구보다 저가 꼴통 않이
(문제아이)라는걸 잘알고 있습니다 부모님도 저때 문에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철이들어 열심히살고있습니다. 알아주셨으면하고여
앞으로 자주 뵙으면 합니다......제가 하고싶은일 열심히해서 저가 말씀
들었지요. 선생님께서도 저가 이일을 하고있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래 그거
평생직업이다 하시면서 만족하신것같내요.....안인가용? 헤헤*^^*항상
최고보다는 최선을다하는 경완이가 될거구요...성공하면 선생님 A급으로
모시겠습니다.........진짜로요.^^

                                              싸랑하는 제자 경완 올림.

경완아, 네가 오늘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거듭나기를 시도했었니? 선생님은 항상 선생님께 전화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애쓰던 너의 노력을 잊지 않고 있단다. 나 또한 늘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므로
"경완아,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을 너의 일식 요리솜씨를 빨리 맛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