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작은 돈은 생명이다
윤정숙
특수금속을 수집해 되파는 재활용업체 사장 이윤정(가명)씨.
그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도박과 폭력을 일삼는 남편,
게다가 여덟 식구 생계를 떠맡아
노점에서 옷도 팔고 비디오가게와 호프집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남편이 또 행패를 부리던 날,
그는 어린 딸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가진 건 낡은 승합차 한 대, 현금 2만원과 빚이 전부.
쉼터를 거쳐 월세방을 얻은 그는 재활용회사에 들어가 억척으로 일을 배웠다.
업무회의 내용은 녹음해 퇴근 후 복습해 익혔고,
휴일이면 지게차 운전 연습을 했다.
창업하고 싶었지만 은행대출이 불가능한 그에게 아름다운재단은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주었다.
한부모가 된 그는 그렇게 ‘희망가게’ 주인이 되었다.
회사 다니며 몸 사리지 않고 배운 일솜씨와 열정이 보태져
사업은 일찌감치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대출금과 연 2% 이자를 창업 3년 만에 모두 갚은 그는
“어려울 때 돈만 빌려 쓴 게 아니라 희망까지 빌렸으니 이자도 참 싼 이자다”
라고 말한다.
‘가난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빈곤의 여성화’ 중심에 여성 가장이 있다는 건 오랜 상식이다.
한부모 가구 중 80%가 여성 한부모.
이들 가정의 아동빈곤율은 평균의 3배, 소득은 남성 가구주의 절반이다.
경제적 고통, 끈질긴 편견과 낙인은 맨발로 얼음 위를 걷는 삶이다.
‘희망가게 프로젝트’는 8년 전 한 기업가의 유산 기부로 시작되었다.
돈보다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 더 큰 힘이 되었다는 그녀들.
가게에 담은 그녀들의 꿈이 부서지지 않도록
경영 컨설팅, 교육과 정서 돌봄 프로그램도 당연히 함께 가며,
상환금은 또다른 여성 가장의 창업 대금으로 선순환된다.
이달 말 100호 가게가 문을 연다.
희망가게는 참 느리다.
방글라데시에서 무함마드 유누스 총재가 시작한 ‘그라민 은행’이 성공하면서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 브랜드가 되었다.
대출자 중 여성이 95%. 유엔은 2005년을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해’로 정했고,
유누스 총재는 2006년 노벨평화상과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그라민 은행을 본떠 여러 나라에 속속 이 사업이 등장했고,
대출자금 규모가 커져 거대기업화된 곳도 있다.
인도에서는 최근 몇년간 시장이 10배나 불어났다.
그러나 얼마 전 유누스 총재가 분분한 이유로 사퇴하면서 이 사업은 도마에 올랐다.
터무니없이 높은 금리와 상환 독촉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고리대금업과 다름없다는 비판도 높다.
장하준 교수 말대로 위대한 ‘희망’이 위대한 ‘환상’이 된 것일까.
소액대출이 빈곤의 뿌리를 뽑는 최고 해법은 아니다.
문제는 사업 자체가 아니라
제도금융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눈과 운영방식이다.
사업이 거대화·제도화되면서 사람보다 시스템이 더 앞서는 것,
대출 금액과 대출자 수로 성공을 따지고,
돈 회수에 무리수를 두는 데 있다.
마이크로크레디트,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작은 돈’이다.
스스로 서려는 그들의 작은 의지를 잊지 않을 때,
너무 크거나 너무 빠르지 않게,
관보다는 공동체와 상호연대의 가치를 지닌 민간이 주도할 때 작은 돈은 생명이 된다.
세계 최초의 비영리 벤처캐피털 ‘어큐먼 펀드’의 설립자이자
<블루 스웨터>의 저자 재클린 노보그라츠는 말한다.
“우리는 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거듭 배웠다.
더욱 강화시켜야 할 것은 깊이 공감하는 능력이다.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성공의 기회조차 가져본 적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머리보다 먼저 가슴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정숙(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