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즐거운 지옥에서 살아남기
김별아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었다.
그래서 사랑 혹은 사랑의 실수를 감당하고자 떠난 증조부를 대신해
논밭을 일구어 집안을 일으켰다.
동족상잔의 시기에는 한집안에서 이장과 인민위원장이 나와
비극적 활극을 벌이기도 했지만,
똥물을 걸러 장독을 삭인 할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이를 갈기보다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밭을 갈았다.
아버지는 농사꾼이 되기 싫어 대처로 나왔지만 노는 땅을 두고 보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퇴근 뒤 짬짬이 돌본 밭에서 알이 굵은 감자를 캤다.
어린 날의 희미한 기억이지만
검은 흙에서 보얀 감자가 튀어나올 때마다 가슴을 흔들던 설렘과 환희는 고스란하다.
봄볕에 데워진 땅이 따끈하다.
지난주에 동생이 퇴비를 두어 갈아놓은 흙은 누그럽고 포실하다.
올해는 큰맘 먹고 아이의 학교 주말농장에서 텃밭 한 귀퉁이를 분양받았다.
노동이라기엔 객쩍은 소꿉질 같은 구메농사지만,
조금만 바지런히 품을 들이면 밥상이 싱싱한 남새로 푸질 것이다.
갈퀴질로 부드럽게 흙을 긁고 손가락으로 홈을 내어
상추와 쑥갓과 부추와 대파 씨앗을 뿌렸다.
먹기야 수십 년을 했지만 기르기는 처음인지라
인터넷에서 검색해 온 파종법에 따라 더듬거리는 손이 아둔하고 민망하다.
어쨌거나 부디 정성을 갸륵히 여겨 싹을 틔워주길 빌며 흙을 다독이노라니
문득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을지니,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기되 새지 않는 법’이라는
<명심보감>의 일절이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진다.
아무래도 나는 이 같은 간명한 위로에 목말랐던 모양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투 다이내믹 코리아’(Too Dynamic Korea)는 악머구리 끓듯 어지럽다.
자고 나면 새로운 사건사고가 기다리고
잠시만 딴전을 팔면 가차 없이 화제에서 밀려난다.
가수나 코미디언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작가에게야 이 즐거운 지옥이 (미치지만 않는다면) 꽤 괜찮은 창작의 산실이라고
엉너리를 부렸건만, 가끔은 욕지기가 나도록 고단하다.
짐짓 무심한 듯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정신건강이 걱정스럽다.
그렇다면 여기가 아닌 그곳,
얀테라면 어떨까?
씨눈이 아래를 향하게 심어야 알이 많이 달린다는 감자를 조심조심 경사면에 묻으며
덴마크의 작은 마을 얀테를 생각한다.
이른바 ‘얀테의 법칙’(Jante Law)으로 알려진 그곳의 삶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남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모든 것에 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남들을 비웃지 말라,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
누군가는 과거 스칸디나비아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일종의 관습법으로
북유럽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그것이
개인의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느끼기는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욕망의 공중누각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기보다는
낮은 자리에서 평등하게 존중하며 서로가 서로를 드높인다.
이른바 복지국가의 모델인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에는
이처럼 완전한 개인에 대한 꿈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기주의나 방임주의와 구분되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마지막 11번째 얀테의 법칙은
‘당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지 말라!’이다.
하늘의 그물만이 아니라 인간의 그물도
개인의 사적 자유에는 충분히 성기되
공적 의무에만은 철저히 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농사를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내게 허락된 손바닥만한 자투리땅에서 흙손이 된 채 위로받는다.
누군가보다 특별하거나 똑똑하거나 중요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혹독한 동시에 공정한 자연은 콩 심은 자에게 콩을 주고
내게는 상추와 쑥갓과 부추와 대파를 줄 것이다.
벌써부터 뱃속이 그득히 푸르러진다.
김별아-소설가-
출처 : 한겨레신문 (2011년 3월 29일 화요일)
'공감 세상 > 공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린 할 말이 없습니다. (0) | 2011.04.29 |
---|---|
봄은 망사다! (0) | 2011.04.29 |
‘정’은 가고 ‘아저씨’만 남는다! (0) | 2011.04.29 |
대학이 뭐죠? (0) | 2011.02.28 |
체벌 없는 교실 (0) | 2011.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