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도에서 나는
거금도에서 나는
오후 다섯 시
교문 바로 앞에 위치한 사택에 들어와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향긋한 달콤함으로
나의 기대를 져버리니 않는 단감과
친구가 정성들여 가꾸어 아낌없는 사랑으로 전해준
노오란 속살의 호박고구마로 주린 배를 채운 후
다섯 시 반 쯤 운동장으로 나간다.
오늘도 하루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태양이
마지막으로 풀어놓은 오렌지 빛마저 거두어들이며
서서히 뚜껑을 닫는 하늘 아래
제 그림자와 이별하는 나무들이
아픔을 견디며 묵묵히 서 있는 운동장에는
초겨울의 쓸쓸함이 가득하다.
나는
초심을 잃지 말고 목표도달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들에게,
너무 늦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딸에게,
술친구에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남편에게,
구순의 연세에 홀로 계신 겨울이
너무 춥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아버님께,
늘 글썽이는 눈매로 다시없는 사랑을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친정 부모님께,
언젠가는 함께 모여 살기 위해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언니와 동생에게 보내기도 하고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며 내일을 계획하고
멀리에 있지만
늘 마음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친구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운동장 스무 바퀴를 걷는 한 시간의 대부분은
늘 하나 둘 셋 넷.....아흔아홉 백
숫자로 채워지곤 한 걸 보면
제대로 기도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할 것 같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나면 일곱 시쯤
온전히 내게 주어진 시간에 늘 감사하며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을 책과의 산책을 시작한다.
작가의 상상력을 놀라워하며
그들의 세계에 빠져 들기도 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들을 통해
부족함을 채우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지평의 영역을 넓혀가기도 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 속 깊은 공감으로 반가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쿵~ 하고 한 대 얻어맞고는
나의 존재가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코끝이 찡하는 뭉클함으로
가슴 한 켠을 내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답답함과 막막함으로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고
큰 사랑의 실천으로 울림이 되는
아름다운 사람 앞에서
나와 나의 주변도 살뜰히 살피지 못하는
초라한 나를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행여나 놓칠세라 맞추어놓은
알람이 열시를 알려주면
그때서야 엉치뼈와 등허리,
침침해진 두 눈의 하소연을 들으며
내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주는
SBS TV의 월화드라마 ‘천일의 약속’과
수목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만난다.
‘천일의 약속’은
내가 사는 세상과 동떨어진 환경과 정서이기는 하지만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을 생각하게 해 주고
‘뿌리 깊은 나무’는
무지한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과 자신만을 위하는 사대부들을 보며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풍자하는 것 같아
시원한 카다르시스를 느끼게도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약간은 옆으로 비켜서서 바라보기도 하면서
몰입을 하다보면
하루의 피곤을 풀기 위해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한동안은 드라마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때로 사람들은 내게
섬에서 혼자 뭐하며 지내느냐고 묻곤 한다.
퇴근 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정서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기에
오늘도 거금도에서
난 홀로 있으되 전혀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