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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정

pjss 2011. 8. 24. 10:24

[삶의 창]

                                             어떤 여정

                                                                                                        황선미

방학은 내게 중요하다.

독서하고 집필하고 좀 멀리 여행도 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정신 말짱하고 두 다리 튼튼할 때 멀고 어려운 곳부터 봐두고자 한다.

남북극, 독도, 아프리카, 빙하, 오로라 체험, 수목한계선 이상 올라가기 등등.

옐로스톤은 그중 하나였다.

이상기온과 관광객 때문에 훼손이 심해져 휴식년에 들어갈 수도 있다니

더 늦기 전에 가보고 싶었다.

재개장까지 백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나.

우리가 상상하는 자연은 어떤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옐로스톤은 우리 상상 너머에 있는 게 분명하다.

마지막 빙하시대부터 유지돼 온 자연환경이라는 지구 최대의 국립공원.

영하 40도 이하 극단의 추위가 5개월 이상 지속되고,

자연의 힘만으로 지배되는 원시 지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곳.

지표면 5㎞ 밑에 엄청난 규모의 마그마가 끓고 있어서

이것이 터지면 미국의 반이 화산재로 뒤덮인다는 곳.

그곳에 발 들이는 하루를 위해서 오고 가고 나흘을 허비해야 하는 여정.

괜찮은 방법이 더 있겠지만 나로서는 4박5일 패키지여행도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이나마도 사치였을까.

4500㎞를 달려야 할 버스가 최악이었다.

내부에 딸린 화장실 악취에 그걸 처리한답시고 뿌린 약 냄새까지 더해져

숨쉬기가 고역이었다.

버스 교체를 요구하며 항의했으나 결국 소용이 없어 어떤 이는 여행을 포기했고,

포기가 안 되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만 참아달라는 말을 믿고 출발했다.

냄새는 차츰 나아졌는데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 여름, 준사막에 가까운 대륙을 내달리는데 에어컨 고장이라니.

버스 교체가 불가능하다 싶을 만치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었고,

천장의 환기구를 열어놓고 더위를 견디며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이 막막했다.

이 환경이 산뜻하게 바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망치고 말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리라.

그런데 기막히게도 문제가 또 생겼다.

덜걱대던 운전석 옆 창문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사고로 이어질 위기. 여태껏 괜찮다고 큰소리쳐 온 기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해대고,

자기 자랑에 열 올리던 가이드는 무책임하게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가까운 주유소에 차를 대고 비상조처를 하는데

왕년에 자동차 정비사였다는 노인이 나섰다.

사다리를 붙잡아주는 손,

자리를 바꾸어가며 앉는 사람들,

서로 배려하고 먹을 걸 나누는 인심.

파란만장하게 여행을 마쳤다.

그런데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만 있던 노인이

먼저 운전자에게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제법 나이가 든 운전자에게 노인은 수고했다고 말했다.

억울한 걸 따져도 시원찮은 판에.

그런데 나이 든 어른들이 다 그렇게 인사하며 헤어지는 게 아닌가.

거기에 운전자까지 친구와 헤어지듯 손을 흔들어주고 이마의 땀을 훔친다.

노인이 되면 내 아량도 저리될까.

바퀴가 제각각으로 보일 만큼 낡은 버스에

열세 살 소년부터 여든이 넘은 노부부까지 탔었다.

그야말로 뼈마디 삐걱대는 늙은 버스와 함께한 마흔한 명.

자기 베개까지 챙겨온 천식환자부터 인생이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소년,

그 더위에도 손이 차가웠던 노부부.

대학원 진학 전에 부모와 마지막 여행을 온 젊은이들.

해를 마주하고 달리느라 땀범벅이었던 운전자까지 우리는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였다.

문명의 편리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던 여정.

-출처 : 한겨레신문(2011.8.12.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