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4월 14일 화요일
할머니 학생
10여 년도 전의 일이다. 정년퇴직을 하신 한 교장선생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다. 요즈음의 근황을 여쭙는 내게 영어회화 공부를 하신다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연세에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느 그 용기에 감탄을 하고는 나도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며 미술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한 일 년쯤 수채화 그리는 법을 배우다 IMF의 그림자가 전국을 뒤덮는 바람에 우리 집도 경제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두었었는데 그 이후로 마음만 간절할 뿐 아직도 다시 시작을 못하고 있다.
한 해 한 해 점점 많아지는 나이를 탓하며 언젠가 여유로울 시기를 찾는다는 게 영영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며 점점 용기를 잃어가고 있는데,
지난 일요일 밤에 우도 이장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한 분이 미국 하와이에서 오셨는데 우도분교장에서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웬 할머니가?’ ‘그리고 왜 우도에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사람이건, 어떤 이유에서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다는 말에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배우고자 하는 그 분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과 우리 교실에서 항상 혼자 외롭게 공부하는 세은이에게 친구(?)가 한 명 생긴다면 그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한글을 가르쳐 드리겠다고 하였다.
월요일 아침 출근을 하니 일찍부터 그 할머니께서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나라 나이로 70세인 그 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게 살아오면서 내내 한이 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 시절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학교 문턱에 가보지 못한 것은 흔한 일 중의 하나일 텐데 그 할머니는 하와이 이민 40여년 동안에 학생이 되어 보는 게 소원이고, 선생님이란 단어를 불러보고 싶고, 늘 한글을 잘 모르는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에 한글을 깨우치고 싶은 열망으로 우도에 오시게 되었단다.
우도에 친척이나 연고가 있으신 줄 알았는데 작년 SBS 방송의 ‘잘 먹고 잘 사는 법’ 프로그램을 그 먼 곳 하와이에서 보시고는 방송국에 연락을 취해서 찾아오셨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한글이 배우고 싶으셨으면.......’
한글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간단히 점검을 한 후에 닿소리 홀소리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 기역, 니은, 디귿....... ㅏ, ㅑ, ㅓ, ㅕ....... 가, 나, 다, 라....... 글자를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시던지 곁에서 보는 나도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평생소원이던 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 보고 싶다며 오늘은 점심 도시락도 싸 오셨다는 할머니는 아침에 등교하지마자 가져오신 원두커피를 내려놓고선 어제 학습한 내용을 복습하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동안 혼자서 심심해하던 세은이도 할머니 친구가 있어서 참 좋다며 할머니가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나보다 먼저 가르쳐 드리곤 하는 것이었다.
너무 조용하기만 하던 우리 교실이 혜성처럼 나타난 할머니 학생 덕분에 활기가 있고 꽉 찬 느낌이어서 참 좋다.
그리고 나도 나이 탓하며 포기하려던 일을 떠올리며 나이가 핑계일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다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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