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가득, 그러나 서툴렀던 초임 시절
열정 가득, 그러나 서툴렀던 초임 시절
『새교육』 한국교육신문사 2004년 2월호
박점숙 / 전남 광양북초 교사
"지금부터 숙제 검사를 하겠어요."
"웅성웅성∼"
"쭈뼛쭈뼛∼"
"자 모두들 조용히 하고 숙제 안 해온 사람은 나와서 한 줄로 쭉 서도록!"
"....."
"손 내밀어!"
"딱-딱-딱-"
"다음!"
"딱-딱-딱-"
"드르륵--"
"!! .....?"
"?...."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숙제를 안 해온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손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 뒷문이 열리면서 교감선생님과 웬 낯선 분이 교실로 들어선 것이다.
'아니, 누구지?'
순간 무척이나 당황하였지만 하던 매질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음 사람 나와."
구세주처럼 나타난 손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의식한 나는 더 야무진 소리로 아이를 불러내어 매를 때렸다. 그런 나의 행동을 보기가 민망했던지 우리 교실을 방문하신 두 분은 슬그머니 뒷문을 닫고 가셔 버렸다. 그 분들이 가시고 난 뒤에도 난 남아있던 아이들의 매질을 다 끝내고 나서야 옆 반 교실로 달려가 방금 우리 교실을 방문했던 분이 누군지 확인을 했더니 교육청에서 오신 장학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장학사가 어떻게 해서 예고도 없이 우리 교실을 방문했었는지 22년이 지난 지금엔 기억조차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그때 그렇게도 열심히 아이들을 매질하는 교사였다는 것이다.
대학생활을 성실하게 보내지 못한 탓에 남들보다 6개월 여 늦은 9월 21일에야 발령을 받았다. 첫 근무지는 면 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바다와 가까운 12학급 규모의 조그마한 산골 학교였다. 발령을 받을 거란 막연한 기대는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혀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발령장을 받고 찾아간 학교는 그야말로 꼬불꼬불 산등성이를 몇 고개 넘어서야 마을과 약간 동떨어진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소개받은 교문 앞에 위치한 관사를 접하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까 보다는
'내가 어떻게 장작에 불을 지펴서 밥을 해먹을 수 있을까?'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무덤들은 또 무서워서 어떻게 견디나?'
하는 생활사가 더 걱정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전기장판과 전기밥솥을 장만해 자취 살림을 차리고서 다음날 출근을 하였다.
교사의 능력은 시험 성적?
4학년 1반 45명의 낯선 아이들이 내게 맡겨졌다. 어떻게 내 소개를 했는지, 나의 학급 경영 관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했었는지, 또 어떻게 첫 수업을 시작했는지 지금엔 기억조차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학력(?)이 낮았던 것 같다. 발령 받은 지 며칠만에 9월말 고사(그때는 매월 치르는 월말고사가 있었음)를 보았는데 반 평균 점수가 2반보다 무려 12점이 낮았다.
난 그 날 이후 아이들의 시험점수 올리기에 열을 올렸다. 그때는 교사의 능력이 아이들의 시험 평균 점수로 판가름난다고 믿었었고,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친다는 것은 곧 시험 점수를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난 그 날부터 아이들의 시험점수 향상을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사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날마다 철필(심이 철사로 된 펜)로 원지(파라핀이 발라진 종이)에 요점 정리나 시험 문제를 긁어 다음 날 아침 7시경에 출근하여 검은 잉크를 묻혀 등사를 하여 나눠주고는 잘 외우지 못하거나 시험 점수가 안나온 아이들은 무조건 매를 때렸다. 매를 때려도 잘 안 되는 아이들은 오후에 해가 질 때까지 남겨서 문제풀이를 시켰으며, 그래도 안 되는 아이들은 아예 관사로 불러들여 함께 잠을 자며 문제풀이를 시켰다.
매질을 해가며 열심히 가르친 결과인지 다음 달 월말고사에선 2반을 앞선 점수가 나왔다. 그로 인해 난 매가 아이들을 바꿔놓는다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일기를 안 써와도, 손등에 때가 끼여 있어도, 준비물을 안 가져오거나 숙제를 안 해와도 무조건 매를 때렸다. 처음에는 손바닥을 때렸으나 말을 안 들으면 매를 때려서 가르쳐달라는 학부모들의 말에 힘을 얻어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매 맞은 자국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도장을 받아오라고까지 하였다. 나의 그 횡포(?) 덕분인지 우리 반 아이들의 생활태도는 날로 좋아졌으며 시험 볼 때마다 평균점수가 잘 나왔고 학부모들은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고 부추겨주니 나의 매 때리기는 승승장구 계속 되었다. 나의 손바닥은 늘 물집이 생기고 상처가 사라질 날이 없었으며 나의 오른 팔은 알통이 다 불거질 정도였으나 난 그것이 훈장처럼 자랑스러웠고 그로 인해 더욱 의기양양했다.
그렇게 매질을 하였지만 그 시절의 난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늘 아이들과 과 함께 하고 싶어 틈만 나면 아이들을 남겨 놓거나 토요일 오후에도, 일요일에도 나물을 캐러 가니, 솔방울을 주우러 가니, 고둥을 잡으러 가니 해서 아이들을 내 곁에 잡아두기 일쑤였다. 하루종일 함께 생활하고도 집에 가서 잠을 청하면 온통 천장에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얼른 날이 밝아서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으니 난 아이들과의 생활에 푸-욱 빠져 지냈던 것 같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돌아와도 하나도 반갑지 않았고 아이들과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야하는 농번기 휴가나 방학은 더더욱 싫었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길을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아이들과 무슨 활동을 할까?' '내일은 어떤 방법으로 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들로 꽉 차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야외수업도 자주 했으며 체험 학습란 용어도 잘 모르면서 그것을 이미 실천했던 것 같다.
종아리에 그려진 매 자국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둔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일요일이었지만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배를 가지고 계신 정식이 아버지께 부탁을 해서 우리 학교의 분교장이 있는 진지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 겨울이라 날씨가 추웠지만 많은 아이들이 참석을 했고 옆 반 아이들과 선생님도 함께 진지도로 향해서 갈 때만 해도 난 진지도에 가서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 생각하며 한없이 들떠있었다. 마침내 진지도에 도착을 했는데 물때가 맞지 않아 배를 모래밭에 바로 댈 수가 없어서 모두들 바지를 걷고 뻘 밭을 조금 걸어야만 했다. 옆 반 선생님이 먼저 내려서 아이들을 받아주고, 난 뒤에서 먼저 내리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야, 수정아! 너 종아리에 뭐가 묻었다."
"어디요?"
"여기..."
"..."
"아니?"
가까이 가서 확인을 하던 난 그만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그것은 내가 때린 매의 자국이었던 것이다. 수정이 뿐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바지를 걷고 배를 내려가는 우리 반 아이들의 종아리에 남겨진 나의 그 혹독한 매질 자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난 그동안 내가 행해왔던 그 잔인함에 몸서리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나의 저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 아이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또 그 매의 자국을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서 보내주었던 학부모들은?'
아니다. 먼저 그런 걸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토록 울긋불긋 물이 들 때 아이들이 얼마나 아팠을까?'
난 그냥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옆 반 선생님과 우리 반 아이들은 갑작스런 나의 울음에 영문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지만 난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앞으로는 절대로 종아리를 때리지 않으리란 다짐만을 거듭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난 '벌은 또 다른 벌을 낳고 칭찬은 또 다른 칭찬을 낳는다' 는 교육의 명언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때서야 매질을 멈출 수 있었다.
나보다 성숙했던 나의 제자들
나의 그리도 혹독한 매질을 견디어 낸 나의 제자들아!
지금도 너희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고 눈시울이 적셔지지만 나의 23년의 교직 경력에 그때보다 더 강한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쳐 본 적은 없단다. 2년 6개월을 함께 한 너희들을 졸업시키고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을 때 난 한참동안을 너희들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데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른다. 내가 새로운 교육 방법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할 때마다 난 언제나 매질을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을 몰랐던 햇병아리 시절의 나와 그 모진 매질을 잘도 견디어 준 너희들을 떠올린단다.
지금도 난 나의 열정이 식어 가는 것을 느낄 때나 내 자신이 나태해진 듯한 생각이 들 때면 그렇게도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의 초임시절을 떠올리며 느슨해진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하지만 그토록 모질게 매질했던 나의 초임시절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한다해도 결코 아름다워지진 않으리라. 그래서 늘 쓰린 상처로 가슴 한 곳에 남아 적당한 무게로 나를 견제하고 있다.
이젠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된 의젓한 제자들이 나를 찾아 와서는 그 지독스러웠던 나의 매질 이야기보다는 우리 함께 고둥을 잡다 숨바꼭질하였던 바닷가 바위동굴, 솔방울을 주워 다 만들어 교실 천장에 매달았던 귀엽고 앙증스럽던 인형, 나물이며 쑥을 캐러 다니며 누볐던 화덕 마을 들판, 스승의 날 선생님께 선물할 손수건을 사러 6km를 걸어서 면소재지까지 다녀와 우리 학교 그 무섭던 호랑이 교장 선생님을 감동시킨 일, 여름이면 무더운 교실을 벗어나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노래 불렀던 음악시간, 가을에 운동장 가의 플라타너스 잎을 주워 책으로 눌러 펴서 썼던 우정어린 시들, 색종이 고리를 엮어서 장식했던 교문 앞 섬잣나무의 그 커다랗던 크리스마스 트리, 애써 만든 카드를 선생님의 남자친구가 있는 군부대로 보내어 우리 선숙이를 찾아왔던 멋쟁이 군인아저씨와의 만남, 일주일이 멀다하고 교실을 빠져 도망간 종철이를 애타게 찾아 헤맸던 산골짜기 등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그 시절을 추억하며 그립다고 한다.
그래서 난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마음씨 좋은 나의 제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비록 서툴렀지만 그때는 그래도 그것이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너희들을 정말정말 사랑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