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반가워서.......
2006년 2월 15일
친구들을 만났다.
동네 깨복쟁이 친구 숙희 어머니께서
영혼의 안식처로 떠나셨단다.
퇴근을 하자마자 친구 점자와 둘이서 순천을 출발하여
7시 경에 광주 조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당곡에 사는 은심이와
화담 사는 경심이가 먼저 와서 반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상복을 입은 숙희는
병환 중이신 아버지보다 먼저 어머니를 보내고도
의외로 담담하다
“아버지도 빨리 가셔요.”
외동딸답게 당찬 말을 했다며 숙희는 웃었지만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담긴 깊은 눈을 차마 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떤 맘일까?’
난 아직 부모와의 이별을 모르기에
그 맘을 이해 못한다.
하지만 지난 추석 때부터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길순이와 단요가 도착하여 우리는 고인의 명복을 빈 뒤
한 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서로의 반가움에 어느새 슬픔도 간 곳 없고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묻느라 여념이 없다.
34년 만에 만난 숙희 사촌 해순이는 한 동네에서 자랐으면서도
나를 기억조차 못한다. 서운하게...
나중에야
“너 이만큼 째깐(?)했잖아. 언제 이렇게 커버렸어?”
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한참이나 컸던 해순이가
이제는 나보다 더 작아 보인다.
(내가 너무 커버렸나?)
함께 온 경심이의 남편은 우리 자리에 와서 술을 따라주며
친구들이 부킹하자고 한다며 우스개로
너스레를 치는데 사람 좋아 보인다.
이런 저런 얘기하다 8시 30분경에 자리에서 일어서 나왔으나
헤어짐이 못내 아쉽다.
바쁜 일이 있는 은심이와 경심이를 보내고도
우리 동네 애들은 차마 절음을 떼지 못해
장소를 옮겨 다시 한 자리에 앉았다.
통기타 가수가 7,80년대 노래를 부르는 곳에서
음악 좋고 분위기 좋았으나
너무나 시끄러워 얘기를 나눌 수 없기도 하고
또, 맥주 두 병 달랑 시켜놓고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자니
문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가 보여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가 없어 밖으로 나와서
이제는 헤어지자며 굳은 결단(?)을 하고 집으로 향해 가고 있는데
동네 사는 머슴아 친구 정기가 전화를 했다.
방금 도착했으니 얼굴이나 보고 가라고.
시계를 보니 10시 10분,
‘지금 내려가면 딱 좋겠는데..’
하지만 어찌 그냥 내려가겠는가?
차를 다시 돌려 돌아가니
정기, 민석, 하남, 기진, 재복이가 우리를 반긴다.
동네 사는 친구들은 언제 보아도 반갑다.
서로 악수하며 반기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송남, 명순, 영님, 정순이가 보인다.
아, 이러다 동창회라도 하겠다.
서울에 바로 올라가야 된다는 친구들을 붙잡아
마땅한 자리가 없어 근처 노래방에 들어갔다.
‘웬, 노래방?’
노래는 부르지 말고 마주보며 얘기나 하자고...
노래방에 들어가 맥주와 음료수를 조금씩 마시며
열세 명이 삥 들러 앉아 서로 돌아가며 친구들의 안부를 묻느라 바쁘다.
정기 혼자 노래방 값을 해야 한다며 ‘누이’를 불렀으나
친구들은 노래보다 얘기가 더 좋단다.
발 넓은 송남이가 대부분의 친구들 소식에 빠삭(?)하다.
난 우리 동강중학교 카페 홍보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저런 얘기 하다보니 벌써 1시가 넘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짙은 안개 속을 뚫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반이다.
식구들에게 미안해 살며시 문 열고 들어가서
친구들 만난 기쁨을 한가득 보듬고 잠자리에 드니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
아침에 남편에게 하남이의 안부를 전하며
노래방엘 갔다고 하니
초상집에 가서 노래방엘 가는 법이 어디 있냐며
정말 별스런 아내와 친구들이란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간 자리에서
친구들 만난 기쁨이 너무 커 미안한 마음이 한 켠에 있었지만
살아생전 그리도 자식들을 챙기시는 우리의 부모님들은
어쩜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기쁨을 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